(미국 여행) 3일차 - 그랜드 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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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에 일어나서 억지로 조식을 먹었다. 도연이도 요거트와 블루베리를 먹였는데, 이것이 큰 문제가 될 줄이야..
7시가 되어 미리 예약한 투어 밴이 호텔 앞으로 찾아왔다. 가이드, 그리고 미리 타있는 사람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머지 다른 사람도 태우고 먼 길을 떠났다. 우리의 루트는 피닉스-세도나-플래그스태프-그랜드 캐년 South rim이다. 차로 대여섯 시간은 걸리는 긴 여정이라 도연이가 좀 걱정되었지만, 내가 바로 옆에서 케어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났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도연이 나이(4살)가 투어에 참여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해줬다.
차 타고 30분이 지났을까, 도연이가 "아빠 배 아파"를 외쳤다. 어제 산 카시트가 좀 불편한 거라 생각하고 괜찮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10분쯤 더 갔더니 "토할 거 같아"라고 말했다. 도연이 배를 계속 만져줬는데 결국 차 안에서 토를 해버리고 말았다.. 보아하니 이른 아침 빈속에 요거트나 과일을 먹어서 자극이 된 모양이다. 게다가 불편하게 여러 사람들과 자동차에 같이 탔으니 소화가 잘 되지 않았을 터..
차 안에는 우리 말고 7명의 손님이 더 있었는데,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비닐 봉투와 휴지, 물티슈를 꺼내주고 우리를 도와줬다. 가이드도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차를 멈추고는, 내가 도연이를 닦아주는 동안 자동차 시트를 닦아줬다. 우는 도연이를 조금 달래고 보니 한 아저씨는 밴 앞쪽 좌석에 앉으면 멀미가 덜 할 거라며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도연이가 너무 힘들어해서 가는 내내 안으며 가느라 허리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이제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오늘 밤에 투어 끝나는데.. 큰일이다..
잠깐 휴게소에 들리는데, 그때마다 도연이가 차에 타기 싫다고 했다. 아들에게 좀 미안했다. 자기가 원해서 따라온 것도 아닌데, 억지로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스스로 좀 반성이 됐다.
출발한 지 2시간 정도 지나, 세도나에 도착했다. 예전부터 세도나의 멋진 경관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들어왔는데, 큰 기대가 되었다. 뷰 포인트에 차를 세워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용한데 웅장하고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트레일 코스를 따라 쭉 걸어가 보고 싶었지만, 오늘의 투어는 눈으로만 구경하는 투어이기 때문에 아쉽게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주변을 360도 둘러보면 곳곳에 웅장한 붉은 사암들이 석상처럼 지키고 서있었다. 언젠가는 다시 또 와서 천천히 거닐어 보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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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Flagstaff라는 동네를 지나가는데, 애리조나에 이렇게 많은 나무와 강이 있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흡사 작은 요세미티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구체적인 이름은 Oak creek이라는 곳이었는데, 주변에 예쁜 숙소와 식당이 오밀조밀 모여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휴가로 오는 곳이라고 했다. 아쉽게도 우리는 이곳을 차로만 지나가며 봤다.
가는 길에 여러번 휴게소도 들르고 원주민 기념품 샵도 들리며, 성인 기준 그렇게 무리한 일정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이드가 정말 부담스럽지도 않고 재밌고 유쾌해서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정말 100점 만점의 가이드였다. 참고로 투어 업체는 Across Arizona Tours입니다.
정오가 되어서야 드디어 그랜드 캐년에 도착! 차량에서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눈을 감았다가 눈을 떴을 때 감동이 잊히질 않는다. 우선 가이드가 South rim에서 가장 좋아하는 포인트라는 Lipan Point에 내려서 경치를 감상했다.
역시나 정말 웅대하고 뭐 이런 곳이 다있나 싶었다. 지난 몇 곳 다녀온 국립공원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였다. 제대로 구경하려면 어림잡아 한 달은 걸리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랜드 캐년에 대한 설명을 가이드로부터 재밌게 들으며 몇 곳 포인트를 더 감상하고 국립공원 내 빌리지로 들어왔다.
점심 시간이 되어 식당에 왔다. 도연이 컨디션이 안 좋아서 뭐라도 먹이긴 해야 하는데, 또 먹고 나면 토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도연이를 안고 식당을 알아보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같이 투어를 다니던 인도 커플이 같이 식사를 하자며 식당 줄도 대신 서주고 도연이 간식도 주었다. 정말 고마운 커플..ㅜㅜ
근데 도연이가 간식을 먹더니 갑자기 식당 안에서 또 토를 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토를 해버렸으니, 나도 너무 당황해서 우는 도연이를 제대로 달래지도 못하고 당장 가진 휴지도 없어 정리도 못하고 우왕좌왕 진짜 멘붕이었던 것 같다. 식당 종업원이 와서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해주셔서 이제야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하며 우는 도연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나와서도 길바닥에서 또 토를 더하며 우는 도연이는 나에게 자꾸 "아빠 토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거였다. 진짜 힘든 건 둘째치고 안타깝고 미안해서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주변에서 길바닥에서 불쌍해 보이는 우리 부자를 보고 휴지를 건네주는 할머니가 계셔서 고마웠다. 주변에서 얼마나 안쓰럽게 보였을까.
좀 추스르고 식당에 들어와 뭐라도 먹긴 해야하니 감자튀김 몇 개를 먹였다.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주고 싶었는데, 식당에 먹을 게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사실 나도 입맛이 별로 없어서 먹고 싶지 않았으나, 먹고 힘을 내야 해서 억지로 먹었다. 빌리지 내 식당가 앞에도 정말 멋진 캐년 풍경 뷰포인트가 있는데, 아들을 챙기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사실 그랜드 캐년에 들어온 이후부터 아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풍경을 온전히 즐기지는 못했다.
빌리지에서 식사를 마치고 피닉스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도 잠깐씩 스팟에 멈춰서 간단한 경치 감상을 하며 즐겁게 올 수 있었다. 캐년 뿐만 아니라 애리조나나 피닉스의 역사, fun fact, 퀴즈 등 가이드가 정말 재밌게 해줬다.
도연이가 토할때 바로 물티슈를 주신 싱가포르 친구들, 자리도 흔쾌히 바꿔주신 아일랜드 아저씨와 이태리 아주머니, 식당에서 우리를 챙겨준 인도 커플, 그리고 내내 잘 챙겨주신 오하이오 할머니, 마지막으로 줄곧 힘들거나 불편한 티 한 번도 안 내준 가이드까지.. 모두에게 너무 고마웠다. 정말 고마워서 마지막에 모두에게 여러분 덕분에 여행 잘했다고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가이드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담아 현금을 탈탈 털어 팁을 드렸다. 도연이는 투어가 다 끝나가니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해서 노래를 부르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정말 긴 하루 였다. 하루 종일 (주변+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달고 산 느낌이었다. 왠지 '그랜드 캐년'하면 풍광보다도 오늘의 힘들었던 에피소드가 기억날 것 같다. 숙소에 돌아와서 어제 먹다 남은 피자와 햇반+김으로 저녁을 때웠다. 도연이는 피곤했는지 일찍 잠들었고, 도연이가 잠이 들자마자 난 바로 맥주를 때려 마셨다.